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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전통 사찰 탐방
경상북도 안동 용수사
기사입력 2013-04-20 오전 11:34:00 | 최종수정 2013-10-28 오전 11:34:38   


動靜閣 上樑文(상량문)

동정각은 용수사의 객실과 공양간을 합친 건물이다. 옛 고찰의 모습을 차츰 찾아가는 용수사에 지금까지 변변한 공양간이 없어 여러 가지로 불편하든 차 주지스님인 상운스님과 회주 스님이신 원행선사의 공덕으로 이번에 그 웅장한 건물의 상량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래 상량문은 그 때 써서 대들보 속에 홈을 파고 넣어, 후세 사람들이 이 동정각 건립의 취지를 알게 하기 위해 작성한 기문이다. 천년이 가도 풍화되지 않는 다는 한제에, 먹으로 써서 상량식을 할 때 잘 보안하였다. 그런데 그 상량문의 내용을 잘 모르는 불자들을 위해 여기 공개하기로 하였다.

-청남 권영한-




動靜閣 上樑文(상량문)
 이 변변찮은 사람에게 動靜閣(동정각) 上樑文(상량문)을 지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願行(원행) 회주 스님이 祥雲(상운) 주지스님에게 물어왔다는 전갈을 듣고,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나고자 한 것은 그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홀연히 한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때 내리는 비처럼 주위를 넉넉하게 품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갖추지 못했고, 식견마저 아직 화려한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기에 감히 누대의 역사와 은사께서 걸어간 화엄의 발자취를 담아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재간이 미치지 못해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공심을 세우려는 원이 부족하여 공덕을 쌓지 못했으니 그저 두렵고 두려울 따름입니다.

하여, 바라고도 바라건대 검은 머리를 기른 산림의 몸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물론, 잠자면서도 목탁의 울림과 독경의 청아함을 귓전으로 누리고 있으니 밥값하지 못한 허물을 조금이라도 덮으려는 가련한 심정으로 있는 힘을 다해 삼세 부처님의 깨달음과 역대 조사의 진면목과 수많은 선지식의 진수를 온몸으로 체득하기를 기원하옵니다.

이 같은 원력을 세우고 나서야 비록 우둔한 둔필이긴 하나 겨우 動靜閣(동정각) 상량문 기일에 맞추어 그간 스님과 처사, 보살에게서 보고 경험하고 들은 것 가운데 전할 만한 것들을 고르고, 고서의 문헌자료 가운데 龍壽寺(용수사)의 역사를 찾아내어 기록으로 남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디 뒷날에 이 글을 보는 후인께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예로부터 이곳에 깃든 상구보제 하화중생의 신앙적 가치를 널리널리 이어가기를 바랄뿐입니다.  

이곳 龍壽寺(용수사)는 안동의 주산인 龍頭山(용두산: 661m) 정맥 줄기의 중턱,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다는 천하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본 天理大(천리대)에 서첩 형태로 보관된 한림학사 崔詵(최선)이 쓴 開創(개창) 비문에 의하면 창건 이전부터 이미 古寺(고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 최초로 용수사를 창건한 분은 봉화 覺華寺(각화사)의 주지인 誠原(성원)이었습니다.

그때가 고려 의종 원년(1146年) 가을이었습니다. 뒤를 이어 그의 제자인 處彛(처이)가 몇 칸의 암자를 수십 칸으로 증축해 면모를 一新했으나, 재정이 곤난을 겪자 釋胤(석윤) 대선사(각화사 주지)에게 이 일을 청원합니다.

 1164年 의종을 만난 釋胤(석윤) 대선사는 화엄사상을 역설할 가람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를 수용한 毅宗(의종)의 결단으로 본격적인 대가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일관인 榮緯(영위)는 왕명으로 龍頭山(용두산)과 龍壽寺(용수사)의 지세를 살펴보고 毅宗(의종) 임금에게 “절터로서 천하제일”이라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이로써 의종 19년인 1165년에 요사와 강당 등 90여 칸이 釋胤(석윤)의 제자인 雲美(운미)에 의해 조영되었고, 불사를 주도한 釋胤(석윤)스님은 명종 3년(1173년) 입적했습니다.
 고려시대 龍壽寺(용수사)의 완성은 역시 釋胤(석윤)의 제자인 3대 주지 廓心(확심)에 의해서였습니다. 經律論(경율론) 등 대장경을 갖추었고 13층의 靑石塔(청석탑)이 호위할 만큼 대찰이었습니다. 1178년 명종은 이를 기념하고자 다와 향과 찬미하는 글을 보내고 700여 사부대중을 모아 장대한 낙성식을 거행했습니다.



이후에도 龍壽寺(용수사)에대한 왕실의 지원은 계속되어 옛 절에 속했던 田柴(전시) 10결이 龍壽寺(용수사)로 귀속되었으며 할복사의 전 40결, 奴婢  30구, 부근의 한전 40결, 또한 하사되어 절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고려 19대 임금인 명종은 무신란에 의해 坤元寺(곤원사)에서 李義旼(이의민)에게 허리가 꺾여 연못에 버려진 형 의종의 원혼을 달래고자 龍壽寺(용수사)를 왕실의 원찰로 삼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龍壽寺(용수사)를 국왕의 원찰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유래에서 기인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龍壽寺(용수사)는 한마디로 유학의 본향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영남 좌도 유학자들을 키워낸 공부방이었습니다.
 
특히 퇴계 李滉(이황)과 聾巖(농암) 李賢輔(이현보) 집안의 가학연원처라고 할 만큼 두 집안과 깊은 관련을 맺었습니다.

한 예로 퇴계 집안의 경우 퇴계선생의 조부인 참판공 繼陽(계양)이 龍壽寺(용수사)에서 讀書如遊山(독서여유산)하고 있는 두 아들 埴(식)과 偶(우)에게 학업에 전념할 것을 당부하는 글을 지어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松齋(송재) 李瑀(이우)는 대과에 급제하여 안동부사와 호조참판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나라 일을 보는 동안에도 龍壽寺(용수사)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카 溫溪(온계) 李瀣(이해)와 退溪(퇴계) 李滉(이황)에게 학문으로 가학을 계승할 것을 권학하는 등 실질적인 진성이씨 퇴계 집안의 중흥조 역할을 다했기에 지금도 사람들은 松齋(송재) 없는 退溪(퇴계) 없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특히 퇴계선생에게 龍壽寺(용수사)는 도학의 전당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물론, 중앙관직에 있다가 물러나서도 龍壽寺(용수사)에 머물곤 했습니다. 이 같은 시절인연은 퇴계선생이 처음으로 지은 樹谷庵(수곡암)과 도산서당 건립으로 이어졌습니다.

퇴계선생 50세 되던 해에 龍壽寺(용수사) 雪熙(설희)스님에게 부탁하여 지은 이 집의 기문에는 “東堂(동당)은 유생이 西堂(서당)은 雪熙(설희)스님이 거처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숭유억불이라는 국법의 지엄함 속에서도 정리로 맺어진 퇴계가문과 龍壽寺(용수사) 간의 떨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이 같은 선업으로 이어져 왔기에 도산서당 건립 또한, 용수사의 法蓮(법련)과 淨一(정일)스님이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퇴계선생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경주에 가서 탁발하면서까지 서당 건립에 매진하던 법련스님의 뒤를 이어 정일스님이 도산서당을 완성했습니다.
 


龍壽寺(용수사)와 도산서당, 용수사 스님과 退溪 집안과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져 陶山九曲文化連帶 활동을 함께 하는 등 회통하고 소통하는 유불의 전통을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聾巖(농암) 李賢輔(이현보), 愼齋(신재) 周世鵬(주세붕), 梅軒(매헌) 琴輔(금보), 謙菴(겸암) 柳云龍(류운룡), 양녕대군의 현손인 完山君(완산군) 李軸(이축), 梅園(매원) 金光繼(김광계) 등 수많은 유생들이 이곳 龍壽寺(용수사)에서 학문에 매진하여 나라를 떠 바치는 동량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龍壽寺(용수사)의 역사에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駐錫(주석)하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서산대사의 淸虛堂集(청허당집)에 의하면 선조11년(1578년) 봄 용두산 용수사 극락전 공사를 계획했고, 아미타불을 모신 황금전각 3칸 규모의 극락전을 61세 되던 1580년에 완공하고 그해 삼월 상한 龍壽寺(용수사)에 묵으면서 극락전 기문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란 중에 사명대사도 승병을 이끌고 용수사에 머물렀는데 일주문 밖 들어오는 초입의 하마비는 그때 사명대사와 승병들이 말을 매어 두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우측의 翠虬亭(취규정)은 임란당시 안동 의병장이었던 龍潭(용담) 林屹(임흘)의 정자인데 翠虬亭(취규정) 편액은 사명대사 惟政(유정)의 친필입니다.

우승지와 대사간을 지낸 李世澤(이세택)이 쓴 龍山誌(용산지)에는 龍壽寺(용수사) 주변에 東庵(동암)과 西庵(서암)은 물론 뒤편으로 산 위에 영은암과 또 그 위에 白雲庵(백운암)이 있었으며 龍門橋(용문교)와 태조 왕건이 3일간 머물렀다는 大王藪(대왕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의 龍壽寺(용수사)는 지금으로부터 107年 전인 을미사변 나던 다음 해인 1895年 정변의 와중에 폐사지가 된 이곳에 다시 불사가 시작된 건 1992년 (불기2536년) 불국선각 願行(원행)선사가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일대 2만평 부지를 매입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오늘날의 문경 鳳巖寺(봉암사), 수원 奉寧寺(봉녕사), 캐나다 벤쿠버 瑞光寺(서광사), 양산 通度寺(통도사) 西鷲庵(서취암), 상주 詳安寺(상안사)를 있게 한 願行(원행)선사가 크게 지팡이를 한번 휘두르고 咆哮(포효)하니 數萬(수만)의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 옛날 삼국시대부터 고찰이 있던 이곳에 白蓮(백련)의 인연이 싹트게 되었으니 묘법의 오묘한 조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994년 9월 19일 요사인 麻衣堂(마의당)과 月午觀(월오관)이 각각 98평으로 완성되고, 그해 12월 11일에 정면, 측면 각각 3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은 대웅전(44평)과 산신각의 낙성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 6월 26일에는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님 점안식이 거행되었으며 96년 9월 29일(음)에는 대웅전 후불정화 및 신중정화, 문수 보현불상 점안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작불사를 지켜보는 이들이 하나 같이 말하길 절 영조의 백미를 보았다 했으니 부처님 전당을 대하는 선사의 정밀함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나아가서는 장대한 일들에 용맹정진한 선사였으나 수선에 몰두한 삶 또한, 달을 두고 맑은 물에 맹서한 초발심의 여법을 향한 여여한 길이었으니 어찌 이것을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통도사에서 月下(월하) 종정을 은사로 출가한 후 오대산 月精寺(월정사), 문경 鳳巖寺(봉암사), 김천 直指寺(직지사), 의성 孤雲寺(고운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 할 제, 月下(월하), 西庵(서암) 두 분 종정을 스승으로 모셨고, 어느 날  선사의 이·사의 경계에 걸림 없이 자유자재함을 본 西庵(서암) 대선사께서 일천 봉우리 위 송암이라 상찬했으니 어떤 범부인들 감히 우러러 보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더러 절을 경영함에 있어서도 갖춤 뒤에 오는 꾸밈처럼 법도가 가지런했으며 험한 일을 하는 비복을 대함에 있어서도 자애로움을 잃지 않았으니 그 은택 입은 이들이 한 결 같이 스님 대하는 것이 마치 일천강 위에 떠오른 달처럼 두려워하며 공경해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편액 動靜閣(동정각)의 動靜(동정)이라는 의미는 화엄의 깊은 철학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본체와 현상계, 또는 현상과 현상이 대립하면서도 서로 융합하여 끝없이 전개되는 역동적인 큰 생명체이듯 나아가는 것과 머무르는 것은 둘이면서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이 논의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 온 유자들의 마음의 변화를 두고 논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자학의 조종인 송나라 사람 朱熹(주희)가 말하길 “理(이)에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기에 氣(기)에도 動靜(동정)이 있으며, 만약 이에 동정이 없으면 어떻게 氣에 動靜이 있겠느냐」라고 설파한 이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대저 退溪(퇴계)와 高峯(고봉)의 사단칠정 논쟁과도 맥이 닿은 심학의 요체인 체와 용을 두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動靜(동정)이라는 편액의 두 글자가 말하는 바는 단 하나입니다.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아가라는 권유입니다.
 
이러한 삶이 무상정등정각을 이룬 인간이 찾아낸 최상의 세계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입니다.
 
사부대중이시여! 모든 사물은 제각기 대립하고 차별하는 한계를 지니면서도 언제나 평등한 본체를 지니고 있으며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는 무한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으니 진공묘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왕 이 세상에 왔다면 이러한 바를 깨달아 우리 모두 최상의 인간이 되어보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성불하십시오.

    2012년(양) 7월 22일

안동시 역사기록관 崔晟達(최성달) 작가의 龍壽寺(용수사) 動靜閣(동정각) 상량 기문을 靑南(청남) 權寧漢(권영한)이 쓰다.

--- 이하 산중첩은 생략함. ----

善惡之報如影從形(선악지보여영종형)
三世因果循環不失(삼세인과순환불실)
此生空過後悔無追(차생공과후회무추)  
    -涅槃經(열반경)-

(해석)

선악의 과보는 마치 
 
그림자 같이 이 몸을 따라다니고

삼세의 인과는 돌고 돌아 
 
결코 없어 지지 아니하네.

이 生(생)을 만일 헛되이 보낸다면 
 
후회해도 다시 돌이킬 수 없다네.

...............................................................................

諸行無常(제행무상)
是生滅法(시생멸법)
生滅滅已(생멸멸이)
寂滅爲樂( 적멸위탁)

<해석>

모든 것이 무상해서 항상 변하는데,이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로다. 이 생하고 멸하는 생멸을 집착함을 놓아버리면, 곧 고요하고 편안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되리라.


...............................................................................



용수사(주지 상운스님)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에 소재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1181년(고려 명종 11)에 최선이 건립하여 창건 되었으며 조선 선조(宣祖) 때 극락전을 중수하였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 중에 용수사와 부속 암자인 영은암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그 후 터만 남은 곳에 승려 원행이 불자들과 힘을 합쳐 1994년에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좌우에 요사 2동이 자리 하고 있으며 대웅전의 전면 3칸에는 사분합 꽃살문을 달았으며 측면과 뒷면에는 빗살문이 달려 있다.

법당 건물 뒤에 문을 단 것은 특이한 경우이며 불단을 벽에 붙이지 않고 간격을 두고 설치하여 필요시 뒷문 으로 도 출입할 수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입상이 협시하고 있다.
 
경내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3호인 안동 용수사 대정삼년명 금동고(安東龍壽寺大定參年銘金銅鼓)를 소장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0호인 안동 용수사 금호비(安東龍壽寺禁護碑)가 자리 잡고 있다.

(특별취재팀)

 

용수사 대정삼년명 고려전기 금동고

안동 용수사 대정삼년명 금동고는 1163년(의종 17)에 제작되었된 동고(銅鼓)이다.

 용수사는 1146년(의종 1) 개창되어 1165년(의종 19)에 용수사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1165년에 본당과 요사채를 완성하고 목조 도금 불상을 감실에 모셨다.

1178년(명종 8)에 13층 청석탑을 완성하고 화엄법 및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후 명종은 의종의 천복(遷福)과 기일재(忌日齋)를 올리는 의식을 용수사에서 시행토록 하였고 1181년(명종 11) 최선(崔詵)이 ‘용두산용수사사적기(龍頭山龍壽寺事蹟記)’를 지었다.조선시대에 쇠락했으나 사적비와 석탑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1580년(선조 13)에 서산대사가 ‘용두산용수사극락전기문(龍頭山龍壽寺極樂殿記文)’을 지었다고 전한다.

1619년(광해군 11)에 원통보전, 지장전, 조전, 선당, 종루, 수월루, 극락전, 나한전 등의 전각이 존재했으나 189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92년 중창되었다.

안동 용수사 대정삼년명 금동고는 용수사를 다시 지을 때 발견되어 보관하게 되었다. 2001년 4월 30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용수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징과 같은 형태로 재질은 청동이다. 동고의 위쪽과 양 옆면에 각각 한 개씩 총 3개의 고리가 있다.

 
앞면 중앙에는 12엽과 18엽의 연화문이, 중간은 연판형 문양대가, 그 바깥쪽에는 ‘대정삼년명금동고(大定參年銘金銅鼓)’ 8자가 2자씩 네 군데로 나누어 양주(陽鑄)되었으며 그 사이에 당초문이 1개씩 새겨져 있다.

동고의 하부에는 길이 15.5㎝, 최대 폭 6.2㎝의 울림통이 있다. 뒷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좌서로 ‘대정삼년명금고’ 7자를 네 군데에 대칭으로 양주해 놓았다.

일부 표면에는 푸른 녹이 끼어 있다.
연대로 보면 용수사에 남아 있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가로 31.3㎝, 세로 30.3㎝, 폭 11.1㎝, 꼭지 폭 9㎝, 두께 0.2㎝이다.

 

 

용수사 금호비

용수사에 있는 시대 미상의 비석 으로 금호비는 용수사 경내에 있으나 본래 용수사 뒷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수사는 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안동과 예안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다.
 
고려 무신 정권 때에 당시 실력자인 최선(崔詵)이 지은 ‘용수사중창기(龍壽寺重創記)’가 있었으나 현재 원본은 전하지 않으며 탁본만 남아 있다. 2001년 4월 30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0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용수사 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31㎝, 폭 45㎝, 두께 17㎝로, 앞면에 34자, 오른쪽과 옆면에 9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이 산에는 제단이나 옛 절뿐만 아니라 영역 안에 중대한 설이 있기 때문에 영원히 산 안에서의 모든 출입을 금지하고 보호하도록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대한 설이란 풍수와 관련된 설로 생각된다. 글을 지은 사람은 일영(日營)으로 되어 있고 비를 세운 연대는 신해년 10월이라 되어 있으나 신해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금호비는 부분적으로 손상된 곳도 있으나 전체 모양이 제대로 남아 있고 그 내용 또한 뚜렷하여 용수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기사제공 : 대구경북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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